
안희연 시인의 이번 책은 여행 에세이다.
여행은 그녀의 삶에 있어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큰 파이를 차지해왔다.
시인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을, 시간을, 예술을, 사랑을 마음으로 주워 담아 언어로 적확하게 풀어내었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줍는 사람이냐고.
책에 붙인 플래그가 가득하다.
시인이 정성을 다 해 주운 것들을 나는 편안하게 쓸어 담았다.
나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은 완독하지 못했고,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는 사 놓고 아직 읽지 않았다. '줍는 순간'을 읽은 후 페소아의 책을 간절하게 읽고 싶어졌다.
p25~26 기르는 일과 길들여 지는 일, 두 꼭짓점을 분주히 오가며 우리는 가족이 되어간다.......명랑한 우울이라고 해도 좋다. 끌고 왔거나 끌려왔거나 우리의 삶이란 목줄에 연결된 채로 지속되는 것. 목줄의 한쪽 끝에 무엇이 묶여 있는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가고 있고 이 길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p36 모든 이별에는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이 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남겨지고 버려지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등은 떠나는 사람이 얼마나 이를 악물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었다. 이별 앞에선 모두가 가엾은 존재들일 뿐 더하거나 덜한 마음이 없었다.
p55 사랑은 상대를 향해 한없이 기울어지는 마음이고 그 기울기가 크면 클수록 존재는 위태로워진다는 것을.....p57 누군가는 내게 ‘비극이더라도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고 유행가 가사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했어.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궁금해. 네가 나에게 어떤 비극이고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이별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만큼 우리를 늙게 만들지. 아프기 싫어서 차라리 무감해지는 쪽을 택하고 통각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토록 기울었던 사랑, 그 시간을 일으켜내지 않고서는 두 번 다시 이 방을 나설 수 없을 것 같아.
p112 나는 다시 그녀(전혜린)의 책을 펼쳐 들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의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 비릿한 감정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왔다. 결국 인간의 삶을 지탱해나가는 것은 온갖 종류의 그리움이지 않겠느냐고, 먼 시간 속의 그녀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p117 책은 영혼의 투시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겪는 일이다.
p124 그 모습을 뒤로 한 채 리스본 거리를 걷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리스본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페소아를 여행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지금 나는 페소아라는 시간 속에 들어와 있고, 곳곳에서 그의 이명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 방금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은 목동 카에이로이고, 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레이스이고, 지금 막 저 트램에 올라탄 사람은 캄포스일지도 모른다는 상상. 무수한 페소아, 페소아들과의 만남!
p155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시 ‘삼십세’ 中)고 했던가.
p170 인간의 감정은 액체와 같아서 쉴새없이 출렁이지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출렁임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그릇이 필요하다. 흘러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정확한 양을 담아낼 그릇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p199 그때 그 여행에서 만난 스라바스티의 대인스님은 “인도인들 마음에는 전쟁(다툼)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매일같이 강가에 나와 몸을 씻고, 사원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죽으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라 했다. 이번 생의 행복과 슬픔은 이번 생으로 끝난다는 것. 그래서 더 나은 삶, 더 크고 좋은 집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오늘 지금 이 곳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지속해나갈 뿐이라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운 일을 어려운 대로 지켜보면서 나는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던 기형도의 아름다운 문장을 떠올렸다.
추천 ****(별4개)